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나라의 베트남 원정 (문단 편집) === 다막 전투와 하이티 전투 === 황제와 황실, 조정은 홍강을 따라 티엔즈엉(天長)으로 후퇴하였고 원나라 군대는 군을 둘로 갈라 추격했다. 추격하는 자와 달아나는 자 사이에 전투가 없을 수는 없었고 마침내 두 나라의 군대가 다막(沱幕)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. 쩐의 장수 쩐 빈쩡(陳 平仲)이 황제가 달아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그의 휘하 600명의 병사들과 함께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다막 강가에서 원나라의 군대를 저지했고 마침내 사로잡혔다. 원나라 측에서는 쩐 빈쩡의 결사대를 뚫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르며 무려 6번이나 공격을 감행해야 했다. 원의 장군은 붙잡힌 쩐 빈쩡이 왕족임을 알고는 그를 회유하기 위해 자신들이 점령한 북쪽의 왕이 되지 않겠냐고 권유했으나 그는 이렇게 답했다. >'''"나는 북쪽보다 주군이 계신 남쪽에 있기를 바라고 우리는 사로잡히면 죽을 뿐이다! 세삼 물어봐야 무슨 소용이냐?"''' 결국 그는 원하던대로 절개를 지킨 채 향년 26세에 죽음을 맞이했다. 훗날 다이 비엣에서는 쩐 빈쩡이 의를 지켰다고 해서 '보의왕(保義王)'으로 추대하였다. 두 번째 싸움은 하이티(海市)에서 벌어졌는데 쩐군은 강에 말뚝을 박아 막았으나 원나라 군은 이러한 점을 예상해 간단히 통과해 버렸고 쩐의 군대는 다시금 패배해 후퇴했다.[* 훗날 원나라의 침공에 쐐기를 박아버린 바익당 전투에서 큰 활약을 한 게 말뚝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오묘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